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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12.12사태는 군사쿠데타? 혁명?

사선탐정 2023. 11. 2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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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는 국가를 위한 혁명?
군사쿠데타?


1979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유신체제는 종식되었고, 국가안보와 사회질서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내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해 권력 장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80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 최규하를 압박하여 집권한 군사 쿠데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군부독재 체제를 강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2.12사태를 국가를 위한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이 시각에 따르면, 12.12사태는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가 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12.12사태가 국가를 위한 혁명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대한민국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적인 통치를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했지만, 반대 세력의 강한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지지 기반이 약하고, 야당과의 대립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은 국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12.12사태 이후, 신군부는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경제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군부는 야당과의 대립을 해소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신군부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각종 경제 정책을 통해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둘째, 12.12사태는 당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이 아직 미흡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화의 초기 단계에 있었고, 군부독재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이 필요했다는 주장이 있다.

12.12사태 이후, 신군부는 군부독재 체제를 강화시켰지만, 동시에 민주화의 씨앗을 심기도 했다. 신군부는 언론 자유를 확대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12.12사태가 국가를 위한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혼란스러운 정국과 미흡한 민주주의 수준으로 인해 국가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군부는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경제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2.12사태가 국가를 위한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2.12사태는 군사 쿠데타로 인한 불법적인 정권 교체였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또한, 12.12사태 이후 신군부는 민주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지연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 12.12사태가 국가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여부는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운 문제이다. 12.12사태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측면과 민주주의를 훼손한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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