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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레닌을 만난 이유
1922년 1월, 홍범도는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의 국가원수인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납니다. 홍범도가 레닌을 만났다는 사실은 국내에도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많이 알려진 것처럼, 홍범도는 레닌을 만나서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였을까요?
홍범도가 1938년 무렵 직접 쓴 1차 사료가 있습니다. 자서전인 ‘홍범도 일지’죠. 이 내용은 2014년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가 펴낸 단행본 연구서 ‘홍범도 장군’(한울아카데미)에 수록돼 있습니다.
이 자서전에는 홍범도 자신이 쓴 ‘이력서’가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1921년 동지달에 모쓰크와로 레닌동무게로 1921년 자유시에서 조선빨찌산을 어간에 뉴혈적 사변이 난데 대한 보고를 하려고 조선빨찌산대표로 갇다.”
레닌을 만난 이유가 ‘자유시 참변 보고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서전의 본문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레닌께서 저를 불러오라고 사단이 내려옴으로 제 레닌께 들어가서 뵈온 일도 있고 말씀에 대답한 일도 있다. 자유시 사변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금화와 권총을 선물 받았습니다. 홍범도는 이 권총을 줄곧 차고 다녔고, 1923년 그를 배신자로 몰아 암살을 시도하려는 감창수·김오남에게 이 총을 쏴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전후 정황상 레닌의 ‘하사품’은 항일 투쟁의 공로가 아니라 자유시 참변 때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보입니다.
자유시 참변, 홍범도의 변절
자유시 참변은 1921년 12월 17일, 소련 연해주 자유시에서 일어난 무장 충돌입니다. 당시 홍범도는 자유시에서 1만여 명의 한인 독립군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련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독립군을 무장해제하고 소련군에 합류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또한, 홍범도의 변절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에 협력한 홍범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협력하며 살아갑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 뒤에도 그는 소련 정부의 정책에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1923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 때 그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군과 싸우려 소련군에 입대하고 싶었으나 나이가 많아서 못 했습니다.
홍범도는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습니다.
홍범도의 평가
홍범도는 청산리 대첩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협력하며 독립운동에서 멀어졌습니다.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의 배신자’로 비판하고, 또 다른 일부에서는 그를 ‘시대의 희생자’로 이해합니다.
어떤 평가를 하든, 홍범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의 행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홍범도의 행적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
독립운동은 단순히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적 상황과 국제 정세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독립운동가는 항상 고뇌와 갈등을 겪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에 따른
대가가 따릅니다.
역사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닙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범도의 행적은 우리에게 독립운동의 의미와 역사의 복잡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관련 기사 링크
https://naver.me/xfker77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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